티스토리 뷰

20살 이후로 처음 읽어보는 시집일 것이다. 메마른 땅에 촉촉한 비가 달게 받아들여지듯, 황무지 같던 내 마음에 이 시집은 감성의 싹이 틔어날 수 있게 해준 씨앗이다. 시인이 그랬듯, 지금은 서정 연습시대. 연습하지 않으면 내 안의 감정들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기에 시집을 조용히 꺼내들었다.

 시집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4가지의 시와 감상평을 아래 남겨 보았다. 시인의 배경과 삶의 철학 등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시가 주는 울림은 상상이상이었고, 오랫 동안 마음 속에 남아있을 것 같다.




서녘 항구


저무는 해 닻을 내리고


서녘 항구,

불타는 관절염의 뼈들을 이끌고

나 여기까지 왔네.


흔들어, 흔들어줘!

순교도 배교도 구원이 될 수 없는 시대,

침묵하는 배들이 바닷속에 뿌리내릴 때

내 일생을 내 일평생을

흔들어, 흔들어줘!


/* 저무는 해의 닻을 내린다는 표현은 짧게는 하루가 끝나감을, 길게는 인생이 노년기에 접어듬을 연상시킨다. 그런 점에서 보면 뜨거운 가슴을 가졌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자신의 형상을 닻을 내리고 항구에 정착해 있는 배에 비유한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인생이 져감은 뭔가 석연치 않다. 항구에 떠 있는 배는 이른 새벽이 되면 다시 닻을 올려 바다로 역동적인 항해를 떠나지만, 화자 본인은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화자는 지금 이 순간, 배가 정착해 있는 이 순간에 자신의 일생을 인생을 다시 흔들어 달라고 하고 있다. 

 살면서 생긴 미련, 아쉬움들을 뒤로한 채 편히 저물어갈 수 없음이 느껴진다. */




물망초


우리가 엽전 열닷 냥 찌개 백반의

자유를 위해 분주할 때에도


모든 길들은 소리 없이 굽이치며 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망초들은 피어난다.


외부를 향한 내부의 내부의

피흘림을 고요히 지우며

물망초는 또 한 가지를 뻗는다.


그와 같이 내 낮은 흐느낌 또한

하나의 말이 될 수 있을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다오.


내가 이 잔을 다 비울 때까지

내가 꿈속에서 다시 한번만 돌아누울 때까지

내가 내 시야를 스스로 거둘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다오,

죽음이여

잠시만,

영원히.


/*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알 수 있는 건 화자가 현세에 미련이 남아 있구나라는 것과 그 미련은 필연적으로 화자가 겪었을 어떤 일련의 사건들 - 그 사건들은 대부분 화자에게 상처 내지 부정적 감정을 줬던 것들 - 과 관련이 있겠구나 라는 점이다. 그리고 내면의 상처나 부정적인 감정 등을 완전히 이겨내고 털어내지 못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수 많은 피흘림과 흐느낌을 고요히 지우며 물망초가 가지를 뻗듯이 화자 또한 내면의 상처, 슬픔, 흐느낌 등을 내려놓아 말로 꺼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극복하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이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마지막 문단에 잠시만 기다려다오. 에서 영원히 라고 바뀌는 부분은 아쉬움을 서정적으로 정말 잘 표현했다. 애절함과 아쉬움이 잘 묻어난다. */




그 거


술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겠는 거, 그거.

담배는 끊어도 커피는 못 끊겠는 거, 그거.

커피는 끊어도 목숨은 못 끊겠는 거, 그거.


믿지 못하는 사이

두 발이 푹푹 빠져들어간다.

빠져들어간다는 것까지도

믿지 못하는 사이로

두 발은 더욱 습한 곳으로

푹푹 빠져들어간다.


(나의 이성과 감정은 언제나

나의 현실보다 뒤지는 거, 그거.)


/* 시집에 있는 모든 시 중 가장 소박하면서 귀엽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흔히 겪는 심적 갈등을 재치 있지만 깊이가 있는 시다. 욕구 중에서도 순위가 있다면 역시 제일은 살고 싶은 욕구라는 것 또한 시에 드러났다는 점이 참 좋다. */




그날의 함성은 아직도 유효하다

---4.19 에 부쳐


만질 수 있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

그 사이에서 4월의 亡者들은            // 亡(망할 망), 者(사람 자), 죽은 사람을 뜻함

돌아앉아 오래도록 꿈을 꾸고


그날의 함성은 아직도 유효하다.


최루탄을 쏘지 마라,

우리는 헤어지지 못한다,

  않는다.


식도와 내장 속으로

소리 없이 피 번지는

그윽한 內出血의 4월에            // 內(안 내), 出(날 출), 血(피 혈)


우리는 다시 본다.

어떻게 절망이 희망 속으로 행군해가는가,

어떻게 슬픔의 이데올로기는

기쁨의 이데올로기와 쾌속으로 만나는가를.


최루탄을 쏘지 마라

그날의 함성은 아직도 유효하다.


/* 나는 직접적으로 운동권에 속해보거나 시위, 데모를 해 본 경험 등은 없지만, 이 시에서 흘러 나오는 뜨거운 감정은 나에게도 스며들어왔다. 특히 우리는 헤어지지 못한다라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사실은 헤어지지 않는 것이지만, 그건 어느새 의지의 영역이 아닌 의지로는 차마 담지 못하는 뜨거운 감정이 되어버린다. 앞에서 쓰러져 가는, 혹은 고통 당하는 동료들을 볼 때의 그 마음은 아직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어떤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결론적으로 보면 항쟁은 성공했고, 슬픔의 이데올로기는 기쁨의 이데올로기로 이어졌다. 절망이 희망속으로 행군하여 이러낸 쾌거다. 그 날의 뜨거움의 열기가 오랜 세월을 넘어 현대까지 흘러 들어온다. */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